"사랑스러움은 찰나이고, 돌봄은 끝없이 나를 붙잡는다. 당신의 거실은 오늘 아침 몇 시에 멈추었는가?"
아침 7시의 교대 근무, 왜 우리(나)는 매일 긴장 속에서 현관문을 여는가
아침 7시 정각, 자녀 부부가 현관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부터 거실은 숨 가쁘게 돌아가는 작은 공장으로 변한다. 밤샘 근무를 마치고 파도처럼 밀려드는 피로를 안은 채 나서는 자녀의 뒷모습을 배웅하고 나면, 이 공간의 지휘권은 온전히 나의 몫이 된다. 막 잠에서 깨어 칭얼거리는 10개월 아기의 울음소리와, 유치원에 가기 싫다며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6세 첫째의 투정이 동시에 거실 사방에서 부딪힌다. 누구 하나 먼저 손을 대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균형이 깨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공기가 매일 아침 거실을 가득 채운다.
10개월의 울음과 6세의 요구가 충돌할 때 조부모가 선택해야 하는 우선순위는 무엇인가

한 손으로는 아기의 젖병을 물리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유치원 가방에 알림장을 챙겨 넣는 일은 고도의 멀티태스킹(Multitasking)을 요구한다. 그 과정에서 한 개인으로서 가졌던 사회적 정체성도, 오후에 처리해야 할 영상 편집 기획안에 대한 고민도 진공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완벽하게 사라진다. 오직 눈앞의 두 아이를 안전하게 돌보는 일만이 삶의 유일한 목적으로 남고, 이 기묘한 과부하 속에서 조부모는 매 순간, 누구의 울음을 먼저 달래야 할지 잔인하게 선택당한다.
통장에 찍히는 유급 수당이 정말, 11시간 반 동안 잃어버린 자유의 값을 매길 수 있는가.
매월 정당한 육아 수고비를 통장으로 지급받고 있지만, 거실 바닥에 발을 디디는 순간 그것이 내 노년의 자유를 완벽하게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서늘한 진실을 매번 깨닫는다. 사람들은 돈이라도 받으니 다행이라 말하지만, 계좌에 찍힌 숫자가 묶여버린 시간의 주체성까지 돌려주지는 못한다. 황혼의 나이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 시간을 마음껏 쓸 수 있는 인생의 유일한 특권이어야 한다. 그러나 유급이라는 합리적 계약 뒤에 숨은 현실은, 내 노년의 황금 같은 낮 시간이 매일 자녀의 거실에 저당 잡힌 채 불평조차 사치로 여겨지는 잔인한 덫에 가깝다.
내 거실을 가득 채운 장난감 틈에서 나의 이름과 자아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첫째 아이를 간신히 달래 유치원 버스에 태워 보내고 돌아서면, 이제 막 기어 다니기 시작해 온 집안을 헤집어 놓는 10개월 아기와의 2차전이 기다리고 있다. 거실 바닥은 알록달록한 플라스틱 장난감과 그림책, 젖병 소독기에서 막 꺼낸 육아용품들로 발 디딜 틈 없이 채워진다. 내 집 안방이고 내 거실임에도 정작 허리를 편히 기대고 쉴 단 한 평의 여백조차 허락되지 않는 이 현실은, 황혼 육아가 지닌 가장 명확한 공간적 고립이자 자아 상실의 증거다.
자녀의 퇴근을 알리는 18시 반의 도어락 소리 전까지 우리는 왜 투명인간이 되는가

오후 6시 반, 자녀의 퇴근을 알리는 도어락 소리가 들릴 때까지 나는 완벽한 투명인간으로 살아간다. 놀이터나 소아과 대기실에서 마주치는 동네 조부모들의 초점 잃은 눈빛과 손목에 붙인 파스는, 우리 모두가 같은 고립의 궤도를 돌고 있음을 증명한다.
사랑하는 손주의 성장을 지켜보는 기쁨의 대가로 치르는 시간의 상실은 결코 가볍지 않다. 매일 쉴 틈 없이 돌아가는 거실로 걸어 들어가는 조부모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그래도 손주 보는 게 행복이지"라는 흔한 위로가 아니라 — 오늘 하루, 어디까지가 내 몫이고 어디서부터는 내려놓아도 되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볼 용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