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키프리안의 Episcopus in Ecclesia et Ecclesia in Episcopo(주교는 교회 안에 있고, 교회는 주교 안에 있다)의 명제 문장은 유효하다. 성경에 있는 장로와 감독을 키프리안이 체계적으로 정립하며, 감독(주교)를 믿음의 상징으로 세웠다. 칼빈은 고대교회의 가르침에 더 사색을 추가하는 것을 주의하도록 했다. 즉 고대교회의 가르침에서 좀 더 성경으로 믿음을 정진하는 경건 훈련을 제안했고, 더 사색을 추가하는 것은 미로에 들어가는 것이다.
교회 직분을 논할 때 반드시 구분해야 할 것이 있다. 하나는 신약의 장로와 감독이고, 다른 하나는 후대 교회사에서 발전한 주교와 장로이다. 이 둘을 구분하지 않으면, 키프리아누스의 “주교 없는 교회는 없다”는 주장을 바르게 평가하기 어렵다. 모든 교회는 직분을 갖고 있는데 직분을 하이라키(계급적)로 보는 성향과 그렇지 않는 성향이 있다. 장로파 교회는 교황주의, 회중주의, 감독주의가 아닌 장로주의인데, 직분의 균등성과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한 형제자매인 것을 세우는 구조이다. 장로교회는 이 두 원리를 함께 세우며, 주교제 하이라키와 무질서한 개교회주의를 모두 피한다. 교회에서 그리고 직무에서 계급은 없지만 질서와 직무 차이는 있다.
신약에서 장로와 감독은 엄격하게 구분된 상하 직분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장로는 πρεσβύτερος, 곧 교회 안에서 원숙함과 지도력을 가진 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감독은 ἐπίσκοπος, 곧 양 떼를 살피고 돌보는 기능을 강조하는 말이다. 두 단어는 서로 다른 계급을 가리키기보다, 같은 교회 지도 직분을 다른 각도에서 부르는 말로 보인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불렀고, 그 장로들에게 성령께서 그들을 감독자로 세우셨다고 말했다. 디도서에서도 각 성에 장로를 세우라고 명령한 뒤, 곧 이어 감독의 자격을 말한다. 그러므로 신약의 기본 구도에서는 장로와 감독이 분리된 하이라키가 아니다. 장로는 감독하고, 감독자는 장로로서 교회를 돌본다.
그러나 후대 교회사에서는 이 구조가 달라졌다. 2세기 이후 교회가 커지고, 이단 논쟁과 분열 문제가 커지면서 한 도시 교회의 대표 감독이 장로단 위에 서는 구조가 강화되었다. 이때부터 감독은 점차 주교가 되고, 장로는 주교 아래에서 목회와 성례를 수행하는 사제 혹은 목회자로 이해되었다. 후대 구조는 주교, 장로, 집사의 삼중 직분으로 정리되었다. 이 구조 안에서는 주교와 장로가 분명히 다르다. 주교는 장로단 위에 서고, 안수와 교구 감독과 교회 일치를 대표한다. 장로는 주교 아래에서 말씀과 성례와 목회를 맡는다.
키프리아누스는 바로 이 후대 구조가 강하게 형성되던 시대의 사람이다. 그는 신약의 장로·감독 동일 구조를 원형 그대로 붙든 사람이 아니라, 이미 단일 주교 중심 질서가 강해진 3세기 교회 안에서 사고했다. 그의 시대에는 데키우스 박해 이후 배교자 처리 문제가 교회를 흔들었고, 노바티아누스 분열 같은 심각한 교회 분열이 일어났다. 키프리아누스는 이 혼란 속에서 참 교회가 어디에 있는지를 물었다. 그의 대답은 “정당한 주교와 함께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키프리아누스에게서 교회의 가시적 일치는 주교와 분리되지 않는다. 그는 “주교는 교회 안에 있고, 교회는 주교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이것은 “주교 없는 교회는 없다”는 명제로 요약된다. 그의 의도는 교회를 분열에서 지키려는 것이었다. 임의로 제단을 세우고, 정당한 교회 질서 밖에서 성례를 행하고, 자기 무리를 참 교회처럼 세우는 분파를 막으려 한 것이다. 이런 역사 상황을 보지 않으면 키프리아누스의 주장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비판하게 된다.
그러나 개혁교회 관점에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중요한 문제가 생긴다. 교회의 일치를 지키려는 의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교회의 표지가 주교직과 지나치게 결합되면 교회는 복음 위에 서기보다 주교 위에 선 것처럼 보이게 된다. 신약에서 교회는 주교가 있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고, 성례가 바르게 시행되며, 성령께서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곳에 있다. 직분은 교회를 섬기는 질서이지, 교회의 존재를 보증하는 절대 표지가 아니다.
따라서 키프리아누스의 “주교 없는 교회는 없다”는 원리는 두 겹으로 평가해야 한다. 첫째, 역사 상황 속에서는 분열을 막기 위한 질서의 원리였다. 둘째, 신학 구조에서는 교회의 표지를 선포된 복음보다 주교직에 두는 위험한 전환이었다. 키프리아누스는 로마 교황 한 사람을 모든 주교 위에 세우는 절대 군주제를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주교들의 주교”를 세우지 않는다고 말하며 각 지역 주교의 권한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가 각 지역 주교를 교회 일치의 중심으로 세운 것은 분명하다. 바로 그 구조가 후대 주교제 하이라키를 강화하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이제 장로교의 구조를 보아야 한다. 장로교에도 감독의 기능은 있다. 그러나 그 감독은 한 사람의 주교에게 집중되지 않고, 장로들의 회의체에 맡겨진다. 개별 교회에는 당회가 있고, 여러 교회는 노회에 속하며, 노회 위에는 총회가 있다. 이 구조에서 목사와 장로는 함께 치리한다. 목사는 말씀과 성례를 맡은 가르치는 장로이고, 장로는 교회의 치리를 맡은 다스리는 장로이다. 두 직분은 기능에서 구분되지만, 교회를 다스리는 권세는 한 사람에게 독점되지 않는다.
노회는 장로교에서 매우 중요한 기관이다. 노회는 목사를 고시하고, 안수하고, 위임하고, 교회를 설립하고, 교회 사이의 질서를 살핀다. 이런 면에서 노회는 감독 기능을 수행한다. 그러나 노회가 주교는 아니다. 왜냐하면 노회는 한 사람의 직분이 아니라 회의체이기 때문이다. 장로교에서 감독은 개인 주교에게 있지 않고, 말씀 사역자들과 장로들이 함께 모인 치리회 안에 있다. 이것이 주교제와 장로교 정치의 결정적인 차이이다.
노회장도 주교가 아니다. 노회장은 총회장과 다르다. 노회장은 실재 교회의 대표로, 지역 지교회를 총찰하고 세우는 역할이다. 총회장은 총회 회의를 진행하는 의장이다. 그는 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안건을 진행하며, 총회의 결정이 바르게 시행되도록 돕는다. 그러나 노회장은 지교회의 한 교회의 사역자이다. 그러나 장로교의 노회장은 독점적 지위를 배제하기 위해서 지교회의 사역자로서 노회장의 직무를 수행한다. 그것은 노회장과 지교회의 대표의 동등성을 구조적으로 밝히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종이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총찰한다. 그리고 노회장은 노회의 결의를 수행하는 항존직이다. 노회가 결정하지 않은 것을 노회장 개인이 주교처럼 창조적으로 창출할 수 없다.
이 점에서 장로교는 주교제와 분명히 다르다. 주교제에서는 주교가 한 지역 교회의 일치와 권위와 감독을 대표한다. 장로교에서는 그 기능을 노회가 회의체로 수행한다. 주교제에서는 감독권이 인격화되어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경향이 강하다. 장로교에서는 감독권이 장로들의 공동 판단과 회의 질서 안에 분산된다. 주교제는 “주교와 함께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고 말하기 쉽지만, 장로교는 “말씀과 성례와 권징이 바르게 시행되는 곳에 교회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장로교 안에 “주교적 기능”은 있지만 “주교 직분”은 없다. 노회는 교회를 감독하지만 주교가 아니다. 노회장은 회의를 주재하지만 주교가 아니다. 총회장도 총회를 대표하지만 대주교가 아니다. 장로교 정치는 모든 직분자를 그리스도 아래 두고, 교회의 권세를 말씀에 묶으며, 치리를 개인이 아니라 회의체에 맡긴다. 그래서 장로교는 주교제를 거부하면서도 무질서를 택하지 않는다. 질서는 필요하지만, 그 질서는 한 사람의 성직 계급이 아니라 말씀에 복종하는 장로들의 공동 치리 안에서 세워진다.
결론은 분명하다. 신약에서 장로와 감독은 같은 직분의 두 측면으로 나타난다. 후대 교회에서 감독은 장로 위에 선 주교로 발전했다. 키프리아누스는 교회 분열을 막기 위해 주교직을 교회 일치의 중심으로 세웠다. 그러나 그 구조는 교회의 표지를 복음보다 주교직에 두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장로교는 이 흐름을 비판하며, 교회의 존재를 주교에게서 찾지 않고 그리스도의 복음, 바른 성례, 말씀에 따른 권징에서 찾는다. 노회와 노회장은 교회를 섬기는 질서이지만, 결코 주교제 하이라키의 대체물이 아니다. 교회는 주교 위에 세워지지 않는다. 교회는 그리스도 위에 세워지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서 성령의 역사로 세워진다.
[부기]
* 항존직은 개인에게 부여된 것이 아니다. 즉 항존직은 종신직이 아니다. 항존직은 직분의 항속성이다. 교회가 존재하는 것을 전제로 반드시 있어야 할 직분이 항존직이다.
* 장로교 목사가 의외로 직분 체계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례가 있다. 하이라키를 부정하기 때문에 그렇겠지만, 또 의외로 하이라키적 성향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것은 총회에서 산적한 회무를 처리할 때 총회장의 독단적인 회의 주도가 용인되는 구조이다. 장로교회는 하이라키(계급적 구조)를 부정한다. 그러나 장로(목사)와 노회장(목사)를 계급적으로 이해하지 않지만, 동일한 성격은 아니다. 즉 노회장은 지교회의 전체를 지교회 담임목사를 근거로 총찰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총회장은 총회 가간에 수행되는 회무를 인도하는 역할이고, 노회장은 지교회의 전체를 총찰하는 역할이다. 장로교의 기본단위는 노회이고, 노회가 모아지만 총회를 구성한다.
형람서원 고경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