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의 로마서 3장 9–20절
강해를 토대로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의 의미를 풀어내며, 모든 인간이 죄 아래 있다는 진단과 율법의 한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주어지는 칭의와 성화의 여정을 유기적으로 설명한 심층 신학 에세이입니다.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3장 9–20절을
붙들고, 바울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인간의 실존을 어떻게 해부하는지를 차분하면서도 집요하게 따라간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는 선언에서 그는 신분과
문화, 경건과 무지의 경계를 모두 걷어내며, 우리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한다. 이 말씀은 과거 로마 교회만을 향한 경고가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유효한 진단서이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는 반문 속의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 신자들까지 포함한다. 구원은 한 번의 사건으로
완결되는 증서가 아니라,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나 ‘아직’ 온전한 성화에 이르지 못한 채 죄와 싸우며 걸음을 옮겨야
하는 삶의 여정임을 상기시킨다.
바울은 여러 구약 본문을 한 줄에 꿰듯 인용하면서 인간 보편의 타락상을 그려낸다. 이 묘사는 단발의 비난이 아니라 구조적이고 점진적인 붕괴의 서사다. 먼저
죄는 보이지 않는 내면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기를 싫어하는 태도, 곧 창조주의 자리를 스스로 차지하려는 반역이 뿌리다. 다음으로 그
부패는 언어를 통해 밖으로 새어 나온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 “혀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는 표현은 말이 단지 소통 수단이 아니라 영혼의 상태를 비추는 거울임을 드러낸다. 끝으로 죄는 행동으로 굳어져 발걸음을 지배한다.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는 대목은 욕망이 어떻게 선택을 가속화하고, 그
가속이 결국 관계를 파괴하는지 보여준다. 이 모든 붕괴의 밑바닥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음”이라는 한 문장이 놓여 있다.
경외의 상실이 질서를 무너뜨리고, 무너진 질서가 곧 파멸과 고생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총체적 타락 앞에서 율법은 구원의 사다리가 되지 못한다. 율법의
본래 기능은 우리를 변호하는 방패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비추는 거울이다. “율법은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을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라.”
율법은 우리가 얼마나 성취했는지를 과시하는 성적표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빚졌는지 보여주는
채권 명세서에 가깝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는
말은 스스로의 도덕적 성취를 근거로 하나님 앞에 서려는 모든 시도를 사전에 차단한다. ‘입을 막는다’는 이미지는 직설적이다. 변명과 자기의가 봉쇄되고, 우리는 침묵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이 침묵은
절망을 위한 침묵이 아니다. 변명이 멈출 때 비로소 복음이 들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3장 21절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는 선언은 구원사의
전환점이다. 율법과 선지자들이 증언한 그 의는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친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을 복음의 심장으로 규정한다.
구원은 인간의 오르막이 아니라 하나님의 내려오심이며, 사람이 획득한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칭의는 죄인의 현실을 미화하는 법정의 요술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신 형벌과 부활로 드러난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실제적 사건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공로가 아니라 빈손이다. 믿음은 붙잡음이고, 붙잡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다.
그렇다고 의롭다 하심이 주어진 순간 싸움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노아가
심판에서 구원받았으나 방주에서 나온 뒤에도 넘어졌듯, 은혜의 역사 안에서도 인간의 연약함은 여전히 남아
있다. 바로 그렇기에 은혜는 더욱 은혜로 남는다. 성화는
칭의의 열매요, 은혜의 능력에 의존한 순종의 실천이다. 여기서
핵심은 습관화된 회개다. 창세기 49장의 “그의 옷을 포도주에 빨며”라는 상징과 요한계시록 22장의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라는 약속은 보혈을 의지하는 지속적 세정(洗淨)의 신학을 제시한다. 회개는 죄책감의 수렁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를 신뢰하여 다시 일어서는 복음적 용기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가난한 심령의 기도는 신앙의 입문에서만
필요한 문장이 아니라, 평생을 통과하는 호흡이다.
복음은 마음을 새롭게 할 뿐 아니라 언어와 발걸음까지 새롭게 한다. 죄가
마음에서 시작되어 말과 행동으로 확장되었듯, 새 생명도 중심에서 시작해 입술과 행실로 흘러나온다. 은혜는 혀를 재훈련한다. 정죄와 험담, 과시와 조롱으로 더럽혀진 입술이 은혜의 말, 중보의 말, 감사의 말로 바뀌어 간다. 은혜는 발걸음을 재배치한다. 폭력과 탐욕의 지름길을 버리고, 화평을 만들어 가는 느린 길을 선택하게
한다.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라는 진단은 결국 방향의
문제다. 하나님을 떠난 길이 파멸이라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길은 평강이다. 그 평강은 상황이 고요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통치하시기 때문에 주어지는 평강이다.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오해하면 방종으로 흐를 수 있지만, 바르게
이해하면 감사와 순종으로 나아간다. 율법은 고발하고, 복음은
해방한다. 율법은 침묵을 명하고, 복음은 찬양을 부른다. 율법은 인간의 무력함을 폭로하고,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선포한다. 이 대조를 기억할 때 칭의의 ‘값없음’은 성화의 ‘값비쌈’을
약화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이미 치러진 십자가의 값이 우리의 일상으로 스며드는 방식—말씀과 기도, 성도의 교제, 성례의
참여, 은밀한 자리에서의 정직함—으로 견고하게 드러난다. 성화는 자기개선 프로젝트가 아니라, 은혜가 열매 맺는 질서다.
이 본문은 ‘누가 더 나은가’를
묻지 않는다.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다.” 이 불편하지만 해방적인 진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비교와 경쟁으로
굳어진 마음이 풀리고 은혜의 평형이 작동한다. 그래서 로마서 3장의
죄론은 타인을 향한 돌팔매가 아니라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거울 앞에서 우리는 바쁠수록 남을 정죄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배운다. 은혜는 사람을 유순하게 만들고, 유순함은
순종으로 이어진다. 죄를 가볍게 여기는 낙관주의도, 죄의식에
눌리는 비관주의도 아닌, 십자가와 부활이 제공하는 복음적 사실주의가 신자의 정서가 된다.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라는 문장은 인간 조건의 비극을 선언하는 동시에 다른 길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 다른 길은 억지로 더 착해지는 우회로나 타협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좁은 문을 통과하는
직로다. 문이 좁다는 것은 선택지를 제한한다는 뜻이 아니라, 생명의
근거를 단 하나로 정한다는 뜻이다. 은혜의 단단한 근거 위에 선 사람은 실패 앞에서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시작점이 언제나 자신이 아니라, 죄인을 의인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의이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의 강해는 그래서 교리적 설명에서 멈추지 않고 일상으로 스며든다. 가정에서 건네는 한 마디, 일터에서 내리는 작은 결정, 교회에서의 조용한 섬김, 고난 속에서의 인내가 모두 보혈의 세정과
은혜의 능력으로 새로워질 수 있음을 강조한다.
결론은 단순하다. 율법 앞에서는 침묵하고, 복음 앞에서는 찬양하라. 자신을 변호하려 들지 말고, 그리스도를 증언하라. 죄의 현실을 부인하지 말고, 은혜의 현실 속에 머물러라. 오늘도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
낮아지는 심령에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히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일으키신다. 그때 ‘파멸과 고생’의 길은 더 이상 우리의 운명이 아니며, 평강과 소망의 길이 우리의 새로운 습관이 된다. 모든 인간이 죄
아래 있다는 진단에서 시작해,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로 끝맺는 복음의 궤적—이 단순하고도 충분한 진리가 오늘 우리를 살리고, 교회를 새롭게 하며, 세상을 향해 다시 걸음을 떼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