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 목사의 사도행전 18장 심층 강해. 세속화의 심장부인 고대 고린도와 현대 런던을 꿰뚫어 보며, 그 속에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향한 교회의 사명을 재조명합니다. 핍박 속에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했던 바울의 전략적 지혜와 하나님의 절대적 보호, 그리고 아볼로의 변화를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영적 통찰과 헌신을 제시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사도행전 18장을 통해 고대 고린도와 현대 런던이라는
두 도시의 영적 단면을 교차 편집하듯 비추며, 세속화의 심장부 한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여전히 일하시며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들려준다. 바울이 고린도에 들어섰을 때 그는 이미 연속된
핍박과 탈진을 맛본 사역자였다. 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음성—“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행 18:9–11)—은 낙심한 심령을 일으키는 존재 자체의 약속이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말씀을 오늘의 런던에 포개어 읽는다. 금융과 예술, 지성의
네트워크가 교차하는 글로벌 메트로폴리스의 화려한 빛 뒤편에는 영적 냉기와 의미 상실, 신앙의 권태가
도사리고 있다. 그럼에도 주님은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다”라고 선언하신다. 눈앞의 황폐함이 전부가 아니며, 아직 이름이 불리지 않은 선택된 무리가 도시의 골목과 캠퍼스와 사무실과 가정의 깊은 곳에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오늘의 교회가 결코 침묵할 수 없는 이유다.
여기서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는 핵심 키워드는 ‘전략’이 아니라 ‘순종’이며, 동시에 성령의 지혜에 근거한 전략이다. 바울의 선교는 즉흥적 열정의
발화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여주신 선교의 질서에 대한 충실한 응답이었다. 그는 어디서든 먼저 회당을 찾았다. ‘유대인 우선 전도’라는 원칙은 편애가 아니라 구속사적 질서에 대한 순복이며,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5–6)는 주님의
파송 명령을 역사적 사명으로 수납한 신학적 선택이었다. 장재형 목사는 이 기조를 오늘의 목회 현장에
적용한다.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은 단지 민족적 범주에
갇히지 않는다. 한때 교회에 있었지만 상처와 실망, 혹은
피상적 신앙으로 떠난 세대, 기독교 문화에 익숙하나 인격적으로 주를 만나지 못해 표류하는 이들, 교회 울타리 안에서조차 말씀의 생명력과 복음의 능력을 맛보지 못해 식어버린 영혼들—이들이 바로 지금 우리의 곁에 존재하는 ‘잃어버린 자’다. 바울이 로마서 9장에서
동족을 향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바라는
심정으로 눈물 흘렸듯, 오늘의 교회가 먼저 품어야 할 대상은 멀리 있는 이방만이 아니라 가까이에 있으나
잃어버린 이들이다. 이것이 ‘도시 선교’의 첫걸음이며, ‘말씀 중심 사역’의
출발점이다.
자비량 선교 역시 장재형 목사가 주목하는 지점이다. 바울은 천막을
만드는 노동을 통해 재정적 자율과 복음의 자유를 동시에 지켜냈다. 고린도 같은 도시에서는 돈과 권력의
흐름이 관계를 규정하기 쉽다. 이때 사역자가 경제적 의존에서 벗어나 있을수록 메시지는 투명해지고 공동체는
건강해진다. 자비량은 단지 소득의 다변화가 아니라,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영적 윤리이며, 도시 한복판에서 교회의 신뢰를 획득하는 장기 전략이다. 런던의 직장인 소그룹, 캠퍼스 사역, 창업 생태계 속 복음 전도는 이러한 윤리를 만날 때 설득력을 얻는다. 평일에는
노동과 학업과 연구의 자리에서 성실히 땀 흘리고, 저녁과 주말에는 말씀과 기도, 섬김으로 공동체를 세우는 이중의 리듬—이것이 도시를 체질적으로 변화시키는
미시 선교학이다.
사도행전 18장의 드라마는 갈리오 총독 앞 재판으로 절정에 오른다. 고린도의 유대인 지도자들은 바울을 세상 법정에 세워 복음을 억누르려 했으나,
갈리오는 현명하게도 종교 내부의 논쟁임을 간파하고 기각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을 ‘하나님의 절대적 보호’의 역사로 읽으면서도, 동시에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교회 분쟁을 세상 법정으로 끌고 가는 것을 수치로 규정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은 때로 세상의 권력을 사용해 교회를 보호하시지만, 교회가
세상의 권력을 빌려 형제를 고발하는 순간 이미 영적 패배를 자초한다. 오늘의 교회가 이 균형 감각을
되찾을 때, 우리는 법과 제도의 울타리를 존중하면서도 십자가의 사랑과 성령의 지혜로 공동체의 상처를
치유하는 더 높은 길을 선택할 수 있다. 영적 성장이란 단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권리의 언어에서 사랑의 언어로 이동하는 성숙이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등장은 초대교회 생태계의 진짜 힘이 어디에 있었는지 보여준다. 사도만이 아니라, 직업을 가진 평신도 전문가들이 ‘말씀 중심 사역’의 든든한 기둥이 되었다. 바울은 그들과 동업하며 삶을 나누고, 그들의 집은 곧 교회가 되었다. 도시 선교의 DNA는 큰 홀과 무대에만 있지 않다. 식탁 공동체, 거실의 찬양, 골방의
중보, 가게의 정직함과 직장에서의 청지기 정신이 야전이 된다. 런던의
집합 주택, 카페, 공용 공간, 대학 연구실은 오늘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들이 교회를 세우는 최전선이 될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은사 상호성’이라는 매우 중요한 원리를 끌어올린다. 직분의 높고 낮음이 아니라, 말씀과 성령으로 빚어진 인격과 은사의 조화가 교회를 견고하게 한다는 것, 이것이
고린도 교회가 실제로 배워야 했던 교훈이었다.
겐그레아에서의 머리 깎음은 바울의 내면을 드러낸 상징 행위다. 학자들
사이에 견해 차가 있으나, 장재형 목사는 이를 나실인 서원의 성취로 해석할 수 있다고 보며, 그 의미를 오늘의 헌신 신학으로 연결한다. 헌신은 가시적 퍼포먼스가
아니라, 소명에 대한 장기적 집중과 경계의 설정이다. 복음을
위해 내려놓을 대상을 분별하고, 삶의 질서를 하나님 중심으로 재편하는 결단—이것이 도시의 소음 속에서도 마음을 보존하는 길이다. 런던이라는 거대한
인풋의 도시에서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거절할지의 윤리를 매일 새로이 선택해야 한다. 나실인의
영성은 바로 그 선택의 지속 가능성을 만들어 준다.
아볼로의 장면은 지성적 도시 사역의 황금법칙을 제시한다.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학문적 정밀함과 설득의 언변을 지녔으되, 그의 신앙은 요한의 세례에 머물러 있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그를 더 정확히 가르칠 때, 그는 지성에서
영성으로, 지식에서 능력으로 넘어간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교정 가능한 지성’의 덕을 강조한다. 오늘의 런던은 세계 최고 수준의 대학과 씽크탱크, 예술 기관을 품고
있다. 그러나 지식 그 자체가 구원을 낳지 않는다. 말씀의
진리에 순복하고 성령의 충만을 사모하는 겸손한 지성이 있을 때, 아볼로는 고린도의 교회를 세우는 강력한
동역자로 거듭난다. 이 만남은 목회자와 평신도, 학자와 기업가, 아티스트와 엔지니어가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상호 제자화의 모델이며, 도시
선교에서 반드시 회복해야 할 교회의 아름다운 장면이다.
고린도와 런던의 공통점은 ‘욕망의 집적’이다. 항구와 시장, 극장과
원로원, 오늘로 치면 금융센터와 미디어, 빅테크와 크리에이티브
산업이 욕망을 순환시키며 인간의 가치를 성과와 소비로 환산한다. 바울은 바로 그 중심을 복음으로 관통했다. 장재형 목사는 도시에 대한 두려움 혹은 회피가 아니라, ‘중심을
향한 선교’가 복음의 원초적 운동이었음을 상기시킨다. 교회가
변방에 안주할 때 도시는 더 깊은 공허에 빠진다. 반대로 교회가 말씀과 기도로 중심을 향해 전진할 때, 도시는 욕망의 용광로에서 사랑의 공동체로 천천히 체질이 바뀐다. 이것이 ‘도시 중심 선교’가 지닌 전략적·신학적
의미다.
그렇다면 오늘의 실천은 무엇인가. 첫째, 잃어버린 양을 향한 눈물의 책임을 복원하라. 통계와 분위기가 아니라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라. 교회를 떠난 청년, 신앙이 사라진
중년, 상처 입은 동역자, 번아웃 된 사역자—그들을 위한 상시적 회복 공간을 만들라. 둘째, 자비량 선교의 윤리를 회복하라. 직업을 하나님께 드리고, 노동을 이웃 사랑의 수단으로 삼으며, 재정을 투명하게 운용하는 삶
자체가 도시 선교의 변증이다. 셋째, 말씀 중심 사역을 구조화하라. 소그룹 본문 주해, 일대일 성경 읽기, 교회력에 따른 강해 설교, 공동체 성경암송과 기도회가 도시의 분주함을
가르는 영적 리듬이 되어야 한다. 넷째, 은사 상호성을 조직하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바울과 아볼로가 서로에게 배운 것처럼, 평신도 전문가와 목회자가 동역하는 다중 중심의 사역 구조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두려움의 문장을 믿음의 문장으로 바꾸라. “두려워하지 말고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는 주님의 명령은 바울에게만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 주어진 현재형 말씀이다.
장재형 목사는 고린도에서 시작된 이 이야기를 런던의 오늘로 끌어와 묻는다. 우리는
왜 말을 멈추려 하는가. 비웃음 때문인가, 실패의 기억 때문인가, 세련된 침묵이 더 지혜로워 보이기 때문인가. 그러나 도시 한복판에는
여전히 “내 백성이 많다.” 이 약속은 우리의 주저함을 꺾는다. 거리의 카페에서, 회사의 점심 테이블에서, 학교의 도서관에서, 지하철의 짧은 구간에서—우리는 성령이 열어 주시는 작은 틈을 발견하고, 거기에 복음의 씨앗을
심을 수 있다. 하나님은 갈리오 같은 권력자도 사용하시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같은 평범한 부부도 사용하시며, 아볼로 같은 지성도 사용하신다.
그러니 교회는 더 이상 ‘가능성 없음’을 말할
수 없다. 도시는 거대하지만 복음은 더 크고, 세속은 강하지만
성령은 더 강하다.
사도행전 18장은 도시의 냉기와 교회의 눈물, 그리고 하나님의 미소가 한 프레임 안에서 만나는 장면이다. 바울의
자비량 선교와 유대인 우선 전도, 도시 중심 선교는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의 온유한 돌파 전략이었다. 주님의 보호는 갈리오 총독의 판결로 역사했고, 교회 분쟁의 윤리는
고린도전서에서 새롭게 정립되었으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가르침으로 아볼로의 지성이 성령의 능력과 결합했다. 나실인 서원으로 상징되는 바울의 헌신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마음과 시간, 재능과 재정은 누구의 것인가. 오늘 우리는
런던의 심장부에서, 혹은 우리가 발 딛고 선 도시의 중심에서, 잃어버린
양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으로 다시 걸음을 옮길 것인가.
결국 장재형 목사가 제시하는 결론은 단순하다. 도시를 두려워하지
말라.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하나님이 함께하신다. 그리고 이 성 중에, 우리의 런던과 우리의 고린도 속에, 하나님의 백성이 많다. 이것이 사도행전 18장이 오늘 우리에게 건네는 현재형 소명이며, 교회가 다시 도시의
중심에서 노래해야 할 복음의 선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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